괜찮다. by 징숙이


어제 씨리얼 그릇을 잃었다.
오빠가 잠깐 탁상에 기대면서 다리가 힘을 잃는 바람에 균형이 깨졌다.
두세동강쯤 난 그릇을 잠깐동안 바라보면서 우선 쏟긴 물들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오빠의 모습을 보자니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아서 일단은 괜찮다고 했다.
정신없이 수습을 하고 나니 이 그릇이 어떤 그릇이었나 스쳐지나갔다.

'8살, 혹은 그 이전부터 동생과 식탁에 마주앉아 같은 그릇, 같은 노랑 곰돌이 숟가락으로 씨리얼을 먹었었는데.
한동안 찾지 않다가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온갖 용도의 식기를 대신해주던 그릇이었잖아.
참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많이 담았었네.'


하니 기분이 급 다운 되기 시작했다.
분명 추억들은 머리속에 남아있는데, 그 추억들을 함께했던 물건이 깨지긴 했는데...
그래도 나름 큰 어른이 이렇게 서운해야 할 일인가.
갑자기 좀 혼란스러웠다.

괜찮지 않다, 괜찮아져야 한다 / 두감정이 싸우고 있을 때즈음 괜찮지 않다는 감정이 앞서 갔다.


"오빠, 이거 나 8살 때부터 시리얼 먹던 그릇이야."

오빠가 정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까봐 두려워서 꺼낸 한마디였다.
오빠는 정말 미안해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빠는 이런 점에서 공감이 잘 되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미안해, 내가 20년동안 더 쓸 수 있는 그릇 사줄게." 

나에게 미안해서 주눅든 사람을 보는 건 화를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징징댈 수가 없었다.



유리 조각들을 버리러 함께 내려갔다.
오늘, 내일이면 사라질 조각들을 보자니 아쉬운 마음이 몰려와서 사진을 찍어 놓으라고 했다.
먹먹했다.



언제쯤이면 이 기분이 괜찮아질까 생각해봤다.
이전에도 이렇게 물건을 잃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자의든 타의든 잃어버린 물건들이 많았다.
지우개, 신발, 피아노, 고등학교 때는 심지어 참고서를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네.
할머니가 점당 10만원 짜리 그림을 액자랑 분리해서 명화는 지난해 달력보다 더 처참히 찢어서 버리고, 액자는 회생도 불가하게 부셔서 분리수거를 할 거라고 내놓은 날에는 그렇게 기분이 더러울 수가 없었다.(지난 시간 잘 살았던 우리 집의 과거를 마치 원래 없었던 것 처럼 지우는 것 같았다.)


그 때도 분명 세상의 끝을 본 듯 기분이 나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또 보란듯이 사라졌네.




일요일에 감을 깎다가 처음으로 과도에 깊게 손가락이 베였다.
이거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려나 싶을 만큼 많이 베인 상처였는데,
이젠 신기하리만큼 거의 다 아물어간다.

그렇게 이번의 아픈 기억도 아물어 가길 바라며.

덧글

  • xxx369 2017/01/12 19:09 #

    저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 기다리는 시간조차 힘들어서 뭐라도 해야 내가 아픈 것에 덜 신경 쓸 텐데. 결국 우왕좌왕하다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지더라구요. 시간 앞에 모든 것이 희미해지네요. 짜증도 아픔도 기쁨도..
  • 징숙이 2017/02/08 16:02 #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말 시간이 흐르니까 저때의 감정도 사라져 괜찮아 졌네요. 비록 또 한번 그릇을 깨먹었지만 ㅜ 한번 깨먹은적이 있으니까 또 그만큼 아프진 않은게 참 사람 마음이 신기해요.
  • 갱이으 2017/02/05 17:08 #

    너의 글을 읽고서 한참뒤에 고등학교때 내가 너의 유리 컵 깬것이 생각이 나서 다시 너의 이글루스를 방문 한다..
    그때도 소중한 컵에 대해 굉장한 아쉬움이 남은 표정을 짓고 있던 너였는데 .. (그때도 괜찮다고는 했던거 같아ㅎㅎ)
    오빠님이 20년 거뜬히 쓸만한 어떤 씨리얼 그릇을 사오실지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
  • 징숙이 2017/02/08 16:03 #

    ㅋㅋㅋ 아직도 기억하고 있니 갱이 나도 기억이 나는구먼 그 쪼끄만 컵. 씨리얼 그릇은 마리메꼬로 받았는데, 저 그릇이 진짜 용량도 넉넉하니 딱이어서 아쉬움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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